곡성 함허정: 자연 속에서 비움과 사색을 느끼는 선비의 정자 가이드
안개가 엷게 깔린 초가을 아침, 곡성 입면의 함허정을 찾았습니다. 들녘 끝에 자리한 정자는 멀리서도 단정한 기와선이 눈에 들어왔고, 그 뒤로 푸른 산 능선이 완만하게 이어졌습니다. ‘국가유산 곡성함허정’이라 새겨진 표석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으며, 그 옆으로 작은 개울이 졸졸 흐르고 있었습니다. 흙길을 따라 정자까지 오르는 동안 짙은 흙냄새와 풀향이 섞여 공기를 채웠습니다. 마당 앞 느티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며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아래로 떨어진 낙엽이 바스락거렸습니다. 고요했지만 생기가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이곳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글을 읊고 풍류를 즐기던 장소라 하니, 그들의 호흡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정자 앞에 서자 마음이 자연스레 가라앉았습니다.
1. 정자로 향하는 들길의 여유
함허정은 곡성읍에서 차량으로 10분 남짓 떨어져 있습니다. 입면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들판 사이로 ‘함허정’이라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을 초입의 공터가 주차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그곳에서 정자까지는 약 200미터 정도의 흙길입니다.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양옆에는 코스모스와 억새가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오전 햇살이 낮게 비치며 정자의 지붕선을 따라 반짝였습니다. 가는 길목마다 들리는 새소리와 물소리가 조용히 겹쳤습니다. 길 끝에서 바라본 함허정은 마치 풍경화의 한 장면처럼 들판과 산, 하늘이 한 화면에 담겨 있었습니다. 마을 어르신 한 분이 “비 온 뒤에는 물안개가 정자 주변을 감싼다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습니다.
2. 정자의 구조와 공간의 질서
함허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팔작지붕 구조로, 목재와 기와의 균형이 잘 맞아 있었습니다. 중앙에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에는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마루에 발을 올리면 나무의 결이 부드럽게 느껴지고, 발아래로 바람이 지나가는 감촉이 전해졌습니다.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구조로, 단청 대신 나무 본래의 색이 남아 있었습니다. 기둥과 창호는 오래된 흔적을 품고 있었지만, 형태는 여전히 곧았습니다. 대청 앞에는 넓은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 앉아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좋았습니다. 정자에 앉아 있으면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마루 밑을 통과하며 부드럽게 울렸습니다. 공간은 단아했지만, 그 안에는 여유와 기품이 함께 깃들어 있었습니다.
3. 함허정이 가진 역사적 의미
함허정은 조선 중기 학자 정유길이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고 시를 읊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함허(涵虛)’란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하나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름처럼 정자는 자연의 품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현판에는 ‘涵虛亭’이라 적혀 있고, 필체가 유려하며 단단했습니다. 내부에는 그의 후손들이 남긴 시판이 걸려 있어 당시의 풍류와 사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그 시판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종소리 같은 가벼운 소리를 냈습니다. 정유길은 관직을 내려놓고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학문과 마음의 도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정자 안에는 단순한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배움과 성찰의 기운이 은근히 배어 있었습니다.
4. 자연과 어우러진 고요한 조화
정자 주변은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가꿔져 있었습니다. 마당의 흙길은 일정하게 다져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돌담이 낮게 둘러져 있었습니다. 정자 앞쪽의 작은 연못에는 물수면 위로 하늘이 비치고, 바람이 불면 잔물결이 번졌습니다. 연못가에는 연잎 몇 장이 남아 있었고, 그 사이로 잠자리 한 마리가 앉았다 날아갔습니다. 벤치와 안내판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게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안내문에는 함허정의 건축 시기와 복원 과정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었고, QR코드를 통해 옛 사진도 볼 수 있었습니다. 관리가 잘 되어 정자의 원형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공간 전체에 정갈함이 감돌았습니다. 사람의 손길과 자연의 호흡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5. 함허정에서 이어지는 곡성의 길
함허정 관람 후에는 인근 ‘압록유원지’로 향했습니다. 차로 10분이면 닿을 수 있으며, 섬진강의 맑은 물줄기와 하얀 모래밭이 펼쳐집니다. 물가를 따라 걷다 보면 들려오는 물소리가 정자에서 느꼈던 고요함과 닮아 있었습니다. 또 다른 방향으로는 ‘도림사계곡’이 있어 계절마다 다른 매력을 보여줍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평탄해, 가볍게 걷기 좋습니다. 점심 무렵에는 ‘입면국밥거리’의 ‘송정국밥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했습니다. 구수한 국물의 맛이 아침의 청량한 공기와 잘 어울렸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정자를 바라보니, 햇살이 기와 위로 스며들며 은은히 빛났습니다. 함허정은 곡성의 자연과 사람의 삶이 가장 평화롭게 만나는 지점이었습니다.
6. 관람 전 알아두면 좋은 점
함허정은 상시 개방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없습니다. 차량은 마을 초입 주차장에 세우고 도보로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름철에는 벌레가 많으므로 긴 옷차림이 유리하고, 비가 온 다음 날에는 흙길이 미끄러우니 주의해야 합니다. 오전 10시 전후의 시간대가 가장 한적하며, 햇살이 마루에 부드럽게 비쳐 사진 촬영하기에도 좋습니다. 정자 내부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으나 마루 앞에서 관람이 가능합니다. 주변은 조용한 농가 마을이므로 큰 소리로 대화하거나 음식물을 반입하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향이 짙은 차나 간단한 물을 준비해 마루에 앉아 쉬면 더욱 좋습니다. 천천히 머물며 바람의 결을 느낄 때, 함허정의 본래 의미가 자연스레 다가옵니다.
마무리
함허정은 화려하지 않지만,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기억에 남는 곳이었습니다. 대청마루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면 바람과 산, 그리고 사람의 시간이 하나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래된 나무 기둥의 질감과 마루 밑에서 올라오는 바람의 온도가 묘하게 따뜻했습니다. 이곳을 떠날 때쯤, 다시금 현판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함허(涵虛)’—비우되 가득한 마음. 그 뜻이 정자의 모든 요소에 담겨 있었습니다. 곡성의 자연 속에 조용히 자리한 함허정은, 세월을 잊은 듯 고요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언젠가 봄 안개가 깔린 새벽에 다시 찾아, 이 정자의 진면목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마음이 한결 맑아지는 시간, 그곳이 바로 함허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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